[인터뷰]‘국내 최초 오빠가수’ 남진


2011년 6월2일 오후 서울 리베라호텔. “어휴 안녕하세요? 조금 늦었네요”라는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로비 커피숍을 찾은 가수. 어린시절 필자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를 흥얼거리게 만든 그 주인공, 남진이다. 거두절미, 인터뷰는 시작됐다.

-반갑고 영광입니다. 하여간 요즘 ‘빈잔’이 화제네요(인터뷰가 이뤄진 무렵에는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남진의 ‘빈잔’을 리메이크해 큰 화제를 모았었다).

=개성대로, 요즘 시대에 맞게 잘 부른 것 같아요. 제 데뷔시절 생각하면 참 많이 달라졌네요. 60년대 말에는 리바이벌 하더라도 원곡을 손상하면 절대 안되는 분위기였거든요. 음정 하나라도 틀리면 선배들이 용납을 안했어요. 한 40년 지나니 편곡도 그렇고 노래 부르는 분위기도 그렇고 많이 변했네요. 임재범 노래 하는 걸 보고 ‘옛날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후배들한테는 좋은 시대 같네요.

-임재범과는 친분이 있으신가요?

=방송 후로 내게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개성있게 멋진 장르로 잘 표현했다. 수고했다’고 해줬죠. 친분이요? 아 그럼요. 그 친구 아버지가 임택근이라고 한 시대를 풍미한 아나운서였어요. 지금은 아나운서가 수백명 있지만, 그 때는 아나운서 하면 임택근이었어요. 저랑도 인연이 깊죠.

-’빈잔’은 어떻게 나온 곡입니까?

=1982년 박춘석 작곡, 조운파 작사의 노랩니다. 이 노래엔 ‘메모리’(추억)가 있어요. 이런 저런 일로 미국에서 4년 머물다 귀국해 이 ‘빈잔’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홍보를 할 도리가 없는 거에요. 5공때 방송에서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제재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활동도 못하고 고향(목포)에 내려가고 말았죠. 아마 이 노래가 제 노래들 중 유일하게 방송 홍보를 못한 노래일 겁니다. 그러다 10년 후인 90년대초에 히트하기 시작했어요. 한두 사람 노래방에서 부르고 이게 계속 알려지고 해서 히트한 것 같아요. 나이든 지금 불러봐도 노래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99년 ‘둥지’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한테는 참 의미있는 곡이죠. 그 당시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이 노래로 다시 의욕을 찾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트로트 4인방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는데 남진이 트로트가 아닌 팝계열 노래를 한다니 방송사 PD도 만류했어요. 트로트풍의 다른 노래를 추천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랬죠. ‘내가 원래 팝을 했던 사람이다. 이 노래를 그냥 부르고 싶다. 도와달라’고요. 이처럼 누구도 기대 안했는데 대박이 났죠.

-지난 3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45주년 공연을 가지셨는데요.

=아, 그 세종문화회관 하면 바로 남진이었죠. 그곳이 옛날 시민회관 자리라는 건 알죠? 제가 국내 처음으로 1971년 리사이틀을 가진 곳이 바로 그 곳이에요. 첫 개인콘서트에, 국내 처음으로 ‘오빠부대’가 등장한 곳이었죠. 72년 불나고 40년만에 그 무대 서니 감회가 아주 새로웠죠. 당시 20대 처녀들이 지금은 60대가 돼 다시 이 남진이를 찾아오고. 60곡인가 불렀는데 마지막에는 좀 힘들더라고요. 아시겠지만 제가 노래 부를 때 춤도 추거든요. 그래도 팬들의 환호가 있으니까 달리면서 노래 불렀죠.

-선생님 하면 역시 ‘님과 함께’ 아닌가요?

=월남서 귀국하니(남진은 69~71년 해병대 복무를 했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쿵쿵따다 쿵쿵따’ 고고가 유행하는 거에요. 군대 가기 전만 해도 이런 빠른 템포의 노래가 없었거든요. 트로트도 지금과는 다르게 아주 느렸죠. 남국인씨가 ‘님과 함께’라는 곡을 만들었는데, 마침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가 저처럼 군대 갔다와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제가 원래 팝송을 좋하했던 터라 그런 식으로 불렀던 거죠. 72년 4월인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연 가서 마침 그곳 힐튼호텔에서 엘비스 실물을 봤죠. 역시 멋지대요. 그래서 엘비스 프레슬리식 의상을 입고 그 노래를 불렇죠. 대 히트를 쳤어요. 아, 세월 참 번개처럼 빠르네요.  

-정확히 데뷔는 몇년도이고 데뷔곡은 어느 노래죠?

=그래요, 정확히 말해줄게요. 하도 이상하고 엉뚱한 기록, 기사가 많아서 그렇잖아도 지적해줄 생각이었어요. 그래도 그 분야 전문가들이 쓰는 건데 그런 식으로 엉망으로 쓸 수 있나요? 저는 65년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노래로 데뷔했습니다. 67년 김영광 작곡 ‘울려고 내가 왔나’까지 오아시스레코드에 있다가 지구레코드로 옮겼고, 그곳에서 낸 게(지구 전속 기념반) 바로 ‘가슴 아프게’였어요. 그러다 3, 4년 인기 좋을때 69년 해병대로 입대를 했고, 71년 제대를 한 거에요.




-’가슴 아프게’ 음반 재킷(사진) 기억나세요?(필자는 그러면서 노트북에 담은 음반 재킷을 보여줬다)

=아 맞아요. 그땐 머리가 짧았어요. 어떻게 이 사진이 남아 있네요.

-작곡가 한동훈사무실을 통해 데뷔했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나훈아도 그곳 출신이고.

=일종의 가요학원이었어요. 제가 먼저 히트를 쳤고, 1년반 정도 후에 이상열이 ‘못잊어 또 왔나’로 히트를 쳤죠. 우리 훈아씨는 잘 모르겠네요. 라이벌이라고 자꾸 그러지마세요. 저보다 한참 어린데..

-당시 방송활동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때는 TBC ‘쇼쇼쇼’가 최고였어요. 이 프로그램 아니면 다른 데는 1년에 한번도 출연을 안했어요.

-최근에는 방송(KBS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조폭에 칼 맞았다는 얘기도 들려주셨는데요.

=토크쇼를 워낙 싫어해서 몇번 거절하다 나간 프로그램인데, 옛 세대인 나와 젊은 세대를 이 정도로까지 연결 시켜줄 줄은 몰랐어요. 그 조폭 얘기 진짜 많이들 하시더라구요. 그 반응을 보고 ‘방송도 가끔 하긴 해야겠구나’ 생각했죠(웃음). 그 조폭 얘기는 이런 거에요. 80년대 후반인가 고향에 잠깐 있었는데 고향 건물에서 유흥업을 하는데 건달들이 밤마다 행패를 부린 거에요. 그래서 주의를 줬죠. 제일 나이 든 놈한테 가서 ‘이러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행패를 부리는 거에요. 그래서 소탕을 해버렸죠. 조직이 아예 붕괴됐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보복이 온 거에요. 예상은 했지만, 제 성격도 건들면 가만 있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그때 왼쪽다리에 찔려 칼이 관통했는데, 지금도 많이 불편해요.

-당시 세시봉 분들하고는 교류가 있으셨나요?

=없었어요. 그 사람들과는 달리 저는 홀로 콘서트를 한 스타일이거든요. 그때는 극장쇼 전성기였는데 저 같은 경우는 거의 1년 내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개인적으로는 김세환이하고만 친했어요. 그 친구가 ‘너와 나’라는 내 노래를 잘 불렀는데, 사실 그 친구 진짜 웃겨요. 왜 분장실 코미디라고 하잖아요. 남들 없을 때 정말 웃겨주는. 그 선친 김동원씨도 제가 잘 알고. 하여간 진짜 순수한 친구에요. 어쨌든 요즘 세시봉이라고 해서 옛날 친구들이 많이 활동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하니까 같은 세대로서 좋네요. 우리는 대중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니까. 낼모레면 벌써 일흔인데 참 시대가 바뀐 것 같아요. 옛날이면 50대 중반엔 은퇴했었는데..

-2010년엔 박춘석 선생님이 작고하셨는데요.

=’빈잔’도 그렇고 제 노래의 70%는 그 분이 작곡한 거에요. 지금까지 연예계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박춘석이에요. 대중이 보면 모르겠지만 남자 중에 남자입니다. 남자로서 자존심과 배짱이 이 양반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애처럼 순수하고 친하면 허물없이 지내지만 경우가 틀리면 어느 누구보다도 무섭거든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한민국 거물들이 이 양반 앞에서 개 묵사발 되는 경우 진짜 많이 봤어요. 제가 ‘오야붕’이라고 불렀던 딱 한 사람이 바로 박춘석이에요. 오야붕 모시고 가수생활 한 것, 후회 없습니다. 내년 3월 박춘석 추모공연을 할 계획인데, 패티김 이미자 문주란 하춘화 같은 많은 가수들이 참여할 겁니다. 기념관도 지을 예정입니다.

 

김관명 연예부장 ㅣ 201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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